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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내용

    중고등학교에서 역사를 배우면서 언제나 아쉬웠던점이 왜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하지 않고 조그마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해서 우리나라가 이렇게 좁고 아등바등 살아갈까를 원망했었고 또 조선시대의 고리타분한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개항시기에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기는 커녕 오히려 쇄국정치로 인해 고립되고 또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는가가 매우 안타까웠다. 크면서 고구려 중심의 한국사에 관해서는 회의가 들었지만 서양의 문물을 제때 수용하지 못하고 시대의 조류에 참여하지 못하여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것에 관해서는 아쉬움이 있었다

    마침 이번에 여기에 관한 주제가 나왔기에 당연히 이 주제를 택하였다. 이때까지의 역사적 사실을 봤을때 내 생각은 일본은 근대화 시기에 서양문물을 적극 받아들인 결과 제국주의로 발전하게 되었고(물론 이것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사실을 말한것이다

    ) 중국은 한국보다는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결과 중간은 갔다고 생각하고 한국은 강제적으로 개항을 당하게 되고 결국은 식민지화된 것으로 보아 근대화 시기에 가장 열등생이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사를 하면서 이것이 그렇게 간단하게 분류될 문제가 아니라 여러 가지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릴때의 생각들은 다분히 감정적인데가 있었고 나이를 조금 먹고 역사에 관한 책을 읽을때는 사실위주로 차분하게 분석이 되는것 같았다. 먼저 한중일 삼국의 개항시기의 각각의 나라 상황들에 대해 조사해 보았다

    조선의 개항기의 상황  
    모든 나라의 말기에는 사회는 어수선하고 기존의 질서는 무너지고 있는 시기이다 조선의 말기도 마찬가지였다.조선이 근대화에 대한 대처는 어쨌든 일본보다는 효과적이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1392년 건국이후 500년간 지속된 조선왕조는 사실 세계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안정성을 유지했었다.그러나 점점 체제의 안정을 위협하는 구조적 왜곡이 축적되어가고 있었다.교수님이 설명하셨다 시피 조선사회는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치며 그 전과 후과 판이하게 다르다고 할수 있다.7년에 걸친 일본과의 전쟁은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문화 모든 영역에서 변화를 가져왔고, 이변화는 궁극적으로 조선을 안으로부터 붕괴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이 전쟁으로부터 비롯된 체재의 와해는 이후 다른 중요한 요인들이 첨가됨으로써 점차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그리고 19세기 후반들어 가시화된 외세의 침입은 조선을 결정적 위기의 국면으로 몰아갔다.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음으로써 조선은 바깥에 문을 열고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되었다.이로 인해 다른세계에 속했던 여러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조선에 직접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조선은 이들과 하나의 세계 속으로 편입되어 갔다.19세기 후반 조선이 맞이한 국가적 위기의 본질을 파악하기위해서는 이 위기의 내적, 외적 근원을 찾아보아야 할 것인데 내적 위기의 가장 직접적인 징후는 19세기 후반들어 증가했던 농민운동이다.농민운동의 발생은 여러 가지 점에서 조선사회의 내적모순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먼저 농민운동을 일으키는 농민의 입장에서 보면 농민들의 경제적 상태가 그만큼 피폐화 되었음을 입증해준다.농민경제의 피폐로 인해 농민운동이 발생했다는 것은 농민들이 생산한 경제적 잉여가 누군가에 의해 약탈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원래 조선의 건국에서 조선의 백성은 농민이자 선비였다.농업사회에서 낮에는 열심히 군가에 쌀을 생산하고 또 밤에는 책을 읽고 공부를 하여 개인의 발전과 또 유학의 발전에도 힘쓰는 이상적인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으나 실질적으로 조선 말기에는 국가의 관리와 지방의 양반들은 농민의 주된 약탈자가 되어 있었다.국가 관리와 이서계급의 불법적 약탈은 조세제도의 전면적인 부패로 연결되어 국가재정을 약화시켰다.농민운동의 빈번한 발생은 농민경제의 파탄, 국가재정의 빈곤과 함께 사회통제 체제의 와해를 입증해준다.혼란한 상황에서 신분질서도 무너지기 시작했다.대구지역의 인구구성 변화를 보면 양반이 전체의 8.3% 평민이 51.1% 천민이 40.1%를 차지하였으나(17세기 후반) 19세기 후반들어서는 양반이 전체의인구의 65.6% 평민이 32.8% 천민이 0.5%를 차지하게 된다.이러한 구성비는 신분질서에 근거한 비공식적 통제력이 더 이상 행사되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다음으로는 외적 위기를 들을수 있다.19세기 후반 서구 열강들은 지속적으로 조선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영국, 프랑스, 미국,러시아 등이 그러한 국가들이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세력들은 조선보다는 중국과 일본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세력들에 의한 위기를 두 나라보다는 피하기가 쉬웠다.일본은 그러나 조선에 대해 관심이 컸고 결국 조선은 1876년 외국에 문을 열게 되었다.일본은 1868년 명치유신을 통해 위로부터의 개혁을 성공시켰고 일본은 계속해서 국교정상화를 요구했다.명치유신 이전까지 양국의 관계는 형식적으로 불평등한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한국의 사신은 일본에 가면 융숭한 대접을 받았지만 일본의 사신은 공식적으로 한국에서 인정을 받지 않았고 쯔시마의 사신만 접견을 허용했다고 한다.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그리고 일본을 변방으로 인식하던 동사이사의 전통적 세계관에 의해 정당화되던 이 관계는 명치유신 이후 일본이 천황체제로 되돌아가면서 근본적인 변화의 계기를 맞게 되었다.결국 일본은 무력으로 조선의 문호를 열려고 하였고 1875년 운요오호를 항로측량이라는 명목으로 강화도 앞바다에 파견했고 이를 공격한 조선군에 대해 월등히 우세한 무력으로 초지진에 무차별 포격을 가한 후 영종진을 점령했다.그 이후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선의 문호개방을 유도했다.강화도 조약은 고등학교때 배워서 알다시피 불평등 조약이였다.삼항의 개항요구 조선 해안에 대한 자유로운 측량허용 개항장에서 일본인에 대한 치외법권 인정등이 그러한 예이다.일본과의 강화도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여러나라들이 비슷한 내용으로 외교관계를 요구해왔고, 이미 국력이 쇠퇴해가던 조선으로서는 이들의 요구를 물리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결국 1892년 이후 조선정부는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러시아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이러한 변화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속으로 조선을 몰아넣었다.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알고 살아왔던 많은 조선인들에게 이러한 변화는 세계의 중심이 흔들리는 혼라이었을 뿐 아니라, 이로 인해 이전에는 자신들의 생활과는 무관했던 바깥세계의 일들이 직접적으로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것이었다.
    전통적 세계의 고수  

    19세기에 나타난 조선의 위기는 안과 밖으로부터 동시에 나타난 것이었다. 내적 위기가 상당히 오래 지속된 만성적인 것이었다면 바깥으로부터 오는 위협은 즉각적이며 가시적이었다

    따라서 조선사회가 안으로부터 무너져 가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일수 있었지만 바깥에서오는 압력은 좀더 직접적으로 느낄수 있었다. 바깥에서 오는 압력은 그동안 지켜왔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기 때문에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세상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고 그에 따른 새로운 시각이 필요했다. 하지만 위정척사론자로 불리는 당시의 일부 유학자들은 전통적인 조선의 정체성과 전통적인 세계관을 끝까지 고수하려고 했다

    조선의 전통적 지식인들은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이었는데 중심에는 문화를 이룬 중국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주변에는 야만이 있었다. 조선의 전통적 정체성을 끝까지 지키려 했던 이항로 최익현 유인석 등의 유학자들중 하나인 유인석이 말하길 ‘중국은 세계의 주류이며 하늘과 땅의 중심이다

    중국이 바로 서면 세계가 인정되고 천지가 이루어진다. 중국이 넘어지면 세계가 어지러워지고 천지가 무너진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세계관에 의하면 서양은 야만의 무리일뿐 아니라 사악한 무리였다. 이항로가 생각하길 도덕을 추구하는 중국과 조선은 양의 기운으로 구성되어있는 반면 도덕은 상실한 채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서양은 음의 기운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양의 기운을 가진 조선이 음의 기운을 가진 서구에 비해 한결 우월할수밖에 없으며 조선은 서구와의 접촉을 최대한 피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이 위정척사론자들은 서구와의 교역도 조선에게는 전혀 이로울 것이 없다는 생각을 지녔다

    서구의 공산품은 얼핏 사람에게 편리한 것 같아 보이나 실상은 사람의 마음을 현혹시켜 피폐하게 만들며 도덕과 예의를 타락시킬 것이므로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것으로 여겼다. 교역을 함에 있어서 조선의 농산품은 1년을 생산해도 부족하고 서구의 공산품은 하루를 생산해도 남으므로 이것을 교환한다는 것은 조선에게 불리한것이라 생각했다
       (이하 생략)
TZ-SHR-639013 한중일삼국의 사회경제와 대응전략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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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삼국의 사회경제와 대응전략의 비교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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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장 조선의 개항기의 상황

    2장 전통적 세계의 고수

    3장 서구적 근대의 탐색

    4장 중국의 몰락과 아편전쟁

    5장 내란

    6장 양무운동

    7장 개항후 중국의 경제

    8장 일본의 메이지유신

    9장 도쿠가와 평화와 막부체제

    10장 대외 문제 발생과 쇄국 체제

    11장 메이지유신과 문명개화

    12장 한중일의 위기인식

    13장 만국공법

    14장 중국

    15장 일본

    16장 한국

    17장 한중일의 위기대응(국내)

    18장 헌정

    19장 동아시아 3국의 산업화 비교

    20장 근대로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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